해운대elegy⑩ 싸운 친구만 생각나는 이유는 무슨이유일까?
1960년대 해운대역에서 바라보는
내가 살던 운촌에는 부산에서도 으뜸가는 주먹쟁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달려오는 택시를 집어던졌다는 '태화'아저씨도 우리 누나 친구인 문자 오빠이고
깡좋기로 유명한 '유지로'라는 이도 누나 친구이고
그 아래 '수구' '윤식이''도명'..등등
그 아래 우리 또래에는 같은 운촌에 사는 '상식'이, '명화'(그 때 모두 나를 그렇게 불렀음)
그리고 해운대 본동에는 온천장집 아들 '싱가' 미포에는 " ? " 그 외에는 모르겠슴
그런데 해운대에는 전쟁으로 인한 고아들이 많아 고아원이 해운대에만 해도 4~5개는 되었는가봅니다.
동백섬에 있는 <종덕원>
해운대역 위에 있는 <아네리세 고아원>
운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박이원(?)인가 하고 그 옆에 또 한 곳
그래서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내 나이 보다 5~6살이 많은 누나 형님들과 학교를 다녔고 그 당시 졸업앨범을 보면 처녀티가 역력한 분들이 동창생이다.
그러니 나이 많은 형님들은 자기 또래와 어울려 놀고 우리와는 함께 놀기를 끄려했다.
가끔 동백섬 바닷가에 자멱질을 하다가 빤스를 갈아입는 형님들을 보면 그곳(?)에 털이 새까맣게 나 있어 우리와 다르구나 하고 느끼곤 했다.
그런데 고아원 출신중에 우리 또래아이들도 성질이 좀 그래서 내가 가끔 때려주면
그날은 학교 방과후 10여명이 떼거지로 나를 잡을려고 해서 도망도 가고 가끔 맛기도 했다.
그네들의 단결력은 식구라는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한번은 내가 나 보다 나이많은 고아원생과 싸워서 그 애가 코피를 흘리고 귀가 했는데 밤 늦게 우리집을 습격해서 출입문을 부수고 야단을 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누나 친구인 주먹쟁이 몇몇이 종덕고아원을 방문해서 그들을 때리고 혼내주었다.
그 당시는 그래도 별 수가 없었다.
그네들은 어느정도 윗선에 가면 꼼짝 못하는 제도때문에 그 뒤로는 나에게 단체로 덤비는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 제압하다보니 나도 내 또래에서는 그래도 2등은 싫었다.
옆반의 덩치큰 아이와 또 붙었다.
겨울철에는 학교 교실뒤 변소담장이 가장 따뜻한 곳이다
긴 교실이 겨울 서북풍을 막아주는 역할이 있어
항상 그곳에는 늦게가면 기대설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늦게온 그 덩치 큰 여석이 내 옆에 오더니 밀어서 내가 넘어졌다.
그 당시는 까칠한 시맨트벽을 기대고 밀치기를 하다보니 교복 뒷등어리가 먼저 떨어지곤 했다.
그래서 함께 넘어졌던 친구들의 체면도 있고 해서 그 자리에 붙었는데 막상막하였다가 공부 시작종이 울려 그만 두었는데 그 뒤 우리 형님이 그 소문을 듣고
나와 그 친구를 데리고 바닷가 모래밭에서 한나절동안 싸움을 붙힌적이 있었다.
결국 내가 이겼었고 다음날 나는 또 그 다뜻한 변소옆에 기대있다가 그 덩치큰 친구가 보이길래 불러 한방을 내리쳐으나
그 친구는 아무 반항을 하지않는 것을 보고 마침내 전교에 명화가 주먹쟁이라고 소문이 퍼졌다.
그렇지만 같은 반 친구는 때린 적이 없고 다른 반 아이들에게 맞고 오는 우리반 친구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집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했다는 사실이 지금와서도 대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