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elegy⑪ 동기생들이 부산으로 진출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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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elegy⑪ 동기생들이 부산으로 진출하는 시기

김명환(22회) 0 3163 0

사진:백년사에서 1970년도 춘천복개공사현장

사진출처 :해운대구청 불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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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창들은 이제 해운대 라는 우물안에서 벗어나 
부산이라는 큰 도시로 진출하는 시기였습니다. 
모두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또 통학을 하며 용돈과 학비를 부모로 받아 스스로 관리의 능력을 시험하는 시기였습니다. 
나는 동래중학교에 응시하고 발표보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가난 때문이였습니다. 
서면에 일찍 가출해서 형님이 계신곳에 가 있다가 동성중학교에 들어 갔다가 2달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해운대 역전위에 학비가 없는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다가 그도 그만두었습니다. 
집에서 놀다가 질이 나쁜 형들과 몇개월 어울리다가 그 때 나를 봐주던 형님이 기차에서 학생을 발로 차서 열차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그도 그만 두고 
시계수리공으로 들어오라는 곳이 있었는데 해운대라서 그도 싫었습니다. 
부산 대청동 보신탕집에서 3개월간 있었는데 밤마다 다락방에 고기국 끓이는 냄새가 올라와 그도 그만두었습니다. 
며칠 부산시내에서 방황하다가 걸어서 그 먼곳 해운대까지 걸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동안 집에서 죽은 듯이 장산에서 나무하는 나무꾼으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좌익운동을 하신 이유로 우리 식구들은 고향에서 쫏겨나 
부산과 해운대로 깊숙히 도망을 나온 관계로........ 
그러니 초등학교는 나왔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한 때는 해운대 시장통에서 <이층집 아줌마>로 부를 정도로 부유하게 산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이유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시험에는 합격하고도 발표현장에 못 가보고 장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불을 지피고 
개울에서 어머니와 자갈 줍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수영비행장 건설현장에 자갈이 많이 필요해서 동네 누구나 대부분 그런일을 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아예 시외뻐스 정류장이나 해운대역 주위에는 못 갔습니다. 
부산으로, 동래로, 중학교 통학하는 친구들이 볼까봐 그리했습니다. 
나는 나무를 한짐지고 철길을 넘어 운촌까지오는 데도 주위를 여러번 살피면서 걸어야 했습니다. 
친구중에서도 주먹으로나 머리로는 한수 위였지만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가지못한다는 이유로 풀이 한풀 꺾인 상태가 된 시기였고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가출도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만 천성적으로 식구를 버릴 수가 없는 성격이라 그리했습니다. 
학교를 못간 것에 대한 불만 불평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런다고 느꼈습니다. 
어릴 때 부터 빨갱이 자식이라는 라벨이 붙어 수 없이 고초를 당하고 이사가고 하던 일이 몸에 베인 덕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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