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elegy34, 철조망에 빨깽이 귀를 여러개 끊어서
해운대백년사에서 1950년도 후반미포부락
내가 처음에는 <미포> 조금 위에서 살았다.
아침일찍 <미포>바닷가에 나가면 고기잡는 아저씨에게서 생선을 조금 얻어올 수 있는 그런 인심이였다.
<미포>에서 좌동으로 넘어가는 그곳에는 야산이 여기 저기 무덤처럼 많이 있었고
언덕 사이사이에는 동백섬 항구에서 싣고온 탄약을 저장하는 탄약고가 즐배했다.
일반인들은 잘 못 지나가지만 항상다니는 나와 아주머니들은 그냥 무사통과다.
그 길이 장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장 쉽고 가까웠다.
그 때 어른들은 "해운대에서 온천이 나고 따뜻하니까 탄약저장고가 많다"고 했다.
장산 산 언저리에는 6.25동란으로 피난민들이 여럿이 집을 짓고 개간을 하며 살고 있었고
<안적사>(지금은 폭포사 라고함)에 치성기도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무당들은 폭포골짜기에 치성을 드릴 때면 과일과 치성드릴 물건을 아저씨2~3명에 짐을 지어 그곳에 머물면서 몇날 며칠 징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머니와 <안적사> 밑 개울가에서 자갈을 소쿠리에 담아 무덤같이 쌓아놓으면
가격을 매기는 아저씨가 "그것은 얼마다"하며 돈을 주고 갔다.
대부분 아주머니들이 하는 일인데 나는 그 때 어머니를 도와 남보다 자갈 모우는데 선수라고 칭찬도 들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개울가에 큰돌은 치우고 그 주위의 자갈을 줍는데 반해
나는 산비탈에 자연적으로 쌓인 잔자갈을 냇가에 옮겨와서 함께 섞어파니 값도 남보다 더 많이 받았다.
미포위에 살 때 그곳을 <대동공업>이라고 불렀는데
6.25전쟁과 관련된 공장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며 아주 어릴 적의 희미한 생각이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그 공장 주위의 철조망에 빨깽이의 귀를 여러개 끊어서
철조망에 꼿아 놓은 것을 본 일이 생각된다.
사실 그 때 빨갱이들은 탄약고에 불을 못질러 안달이였지 않았나 여겨진다.
탄약고에 불을 질러 해운대 주민모두가 수영까지 피난갔던 것도
김해군 진례에 사는 우리 아버지 제지인 '순태'라는 아저씨이니 내가 지금도 잊혀지지않고 생각난다.
그리고 내가사는 <대동공업>에는 공장이 있어서 대동공업 대동공업 하며 자랑삼아 부르던 것이 내 기억속에 생생하다.
형님들이 장산꼴짜기 탄약고에서 포탄(그 때는 '초빼이'라 부름)의머리부분과
허리부분의 신쭈(구리)를 끊어와 파는 곳도 여기였다.
자상한 것은 어려서 살았기에 기억은 없으나 회관마당이라고 하는 큰 마당이 있고
그기에는 여러 음식을 만들어 파는 가계와 공장인부들이 밥을 먹는
함바집이 여럿 있었고 제법 큰 동네였다.
이 대동공업에 살 때 <고두배미>언덕과는 그리 멀지않았다..
좀 커서 학교다닐 때 <고두베기>언덕위에 골프장이 생겼는데 빗나간 골프공 주워 놀기도 하고
벗기면 생고무줄이 한없이 풀려 나오고
그 고무줄에다 종이씹어 앞에 앉은 칭구 머리 맞추다가 빗나가면
칠판에 글 쓰시는 담임선생에 맞아 벌도서고
골프공 속에 고무튜브속엔 페인트도 들어있어 그것 여자칭구 머리에 뭍히기도 하고...